2025' 정태춘 박은옥 문학 Poject
정태춘 박은옥 12 집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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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 /
1. 기러기 (정태춘 노래) 4;04
2. 도리 강변에서 (정태춘 노래). 3;18
3. 나의 범선들은 도시를 떠났다 (정태춘. 노래). 3;43
4. 민들레 시집 (박은옥 노래). 3;37
5. 솔미의 시절 (정태춘 노래). 4;31
6. 엘도라도는 어디 (정태춘 노래). 4;02
7. 집중호우 사이 (정태춘 노래). 3;34
8. 폭설, 동백의 노래 (박은옥 노래). 3;40
9. 정산리 연가 (정태춘 노래). 2;56
10. 하동 언덕 매화 놀이 (정태춘 노래) 2;45
기러기 Geese
도리 강변에서 At The Dori Riverside
나의 범선들은 도시를 떠났다 My Sailboats Left The City
엘도라도는 어디 Where Is Eldorado
솔미의 시절 The Days At Solmi
집중호우 사이 Between Hard Rain
하동 언덕 매화 놀이 Apricot Flower Play On Hadong Hill
정산리 연가 The Love Song Of Jeongsan-Ri
폭설, 동백의 노래 Snowstrom, The Song Of Camellia Flower
민들레 시집 Poetry Book Of Dandelion
*** 전곡 가사
_기러기
기러기 날아가는 저 들판 해질녘
멀리 울려퍼지는 총소리를 들었니
소년은 그 들판을 달리고 마을엔 저녁 연기 깔리고
바람도 없이 물 빠지는 갯벌 소년은 안 돌아오고
기러기 떼 날아간다
기러기 떼 날아간다
앞집 어린 누이는 물 건너 시집가고
늦가을 텅빈 마당 가 쑥부쟁이 여태 피고
큰댁 할아버지 엽총 사냥 나가고, 늙은 포인터 앞세우고
아버지는 객지에서 돌아오고 소년은 아직 안 돌아오고
기러기 떼 날아간다
기러기 떼 날아간다
가물가물 먼 들판 끝 썰물 갯벌 물 빠지고
깊은 도랑 천둥소리로 간척지 장둑 무너지고
붉은 나문재들 어둠이 덮고 물 건너 산 더욱 멀어지고
할아버지 개를 따라 돌아오고 소년은 아무데도 안 보이고
기러기 떼 날아간다
기러기 떼 날아간다
2022. 10
__도리 강변에서
오래 잊혀진 나루에 배는 없고 나는 거기 지는 해 바라본다
오늘이 며칠이냐고 내가 내게 자꾸 묻는다
강은 깊은 산 휘돌아 흘러와 여주 도리 그 강둑길을 지나
뽀얀 노을빛 꿈결 같은 서쪽 마을 너머로 사라지는구나
다시 생각한다, 그 때
어느 산길 끝에서 내가 본 것은 “길이 없습니다”라는 작은 간판
그리고,
그 안에 은밀히 숨겨져 있던 두 노인의 조용한 거처
돌아나오다 돌아나오다 이렇게 끝일까 생각했었다
그 산길 계곡 물 소리 들으며 뛰어 내려오다 서 있다 했었다
오… 계절 깊어가고
오… 그 집, 문득 숲이 되어 있었다
어둑 어둑 이 선생네 양계장 어린 개들이 사뭇 꼬리를 흔들고
그래,
악수를 나눈다는 것도 그저 무심한 일이었다고 해두자
들어온 길로 다시 나가야 한다고 어둠이 스멀 스멀 깃드는구나
떠나고 남는 사람들은 없단다, 다만
길이 여기 저기로 흩어질 뿐
오… 도리 강변 노을 지고
오… 그 강 어둠 속으로 흘러가고
2022. 4
__나의 범선들은 도시를 떠났다
저 하얀 범선을 타고 내 유년의 바다로
저 하얀 범선을 타고 내 전생의 바다로
허나, 그 유년의 바다 너무 얕고
전생 같은 것 어디 있겠느냐 오래 전,
배는 폭풍의 바다를 건너와
항구도 없는 도시 변두리
어느 생선 구이 집 어둔 계단 아래
작은 쪽창에 오래 붙박혀 있구나
오, 하얀 돛 펄럭인다
누가 또 저 배를 보았다 하느냐
그 집 주차장 작은 마당에 햇살 내리고
현관의 오래된 화분들 노랑꽃을 피우고
그래, 겨울이 너무 길었구나
그래, 이제 새 바람이 불어야지
다시 만조의 파도가 도착하면
반도의 풀과 꽃씨를 실은
배는 무거운 닻을 끌어 올리고
계절풍에 하얀 돛을 펼치리라
오, 절벽의 큰 바위 해안
내 안에서 바다 일렁인다
저 하얀 범선을 타고 내 유년의 바다로
저 하얀 범선을 타고 내 전생의 바다로
허나, 그 유년의 바다 너무 얕고
전생 같은 것 어디 있겠느냐
불모의 시멘트와 아스팔트
도시는 메마른 숲을 이루고
여기도 누군가의 유토피아
저 배, 닻을 올리고 있구나
오, 더운 바람이 불고
푸른 바다 일렁인다
오, 푸른 바다 일렁이고
바다에 범선들 가득하구나
2022.9
__민들레 시집
민들레 노랑 꽃 햇살만 기다리고
가늘게 봄비 지나가고
인적 없는 거리 긴 긴 보도블럭 위
너를 닮은 누군가 지나간다
잊혀진 시편들이 아련히 떠오르고
그리워 하세요, 잊지 마세요 하고
거기 오래 꽂혀 있던 책갈피 자욱처럼
지우지 못해 눈 감고
동그랗게 피었다 바람에 흩어지는
민들레 하얀 봄길
걸어간다
봄은 멀리서 오고 누군가 함께 오고
따사로운 햇살 그림자 처럼
고적한 정거장 오래된 벤치 위
바람만 잠시 머물고 있구나
그 옛날 연인들이 아픈 줄도 모르고
그리워 하세요, 잊지 마세요 하고
일생에 단 한 번 쯤 사랑하세요
뜨겁게, 애틋하게
온몸으로 피었다 결국 꽃대만 남아
오래 흔들리는 민들레야
노랗게 피었다 꿈 같은 씨앗 되어
세상으로 흩어지는 민들레야
2022. 6
__솔미의 시절
보슬비 소리에 등불을 켜니 온 산새들 내려와 왁자지껄
새벽 안개는 골짜기를 감추고 닭 울음 소리 산정을 깨우는구나
가을 강 하얀 갈대 밭 침묵처럼 다 쓰러지고
안개 아래 차가운 강물 뒤도 안 돌아보고 흘러만 가고
남한강 대교 한적하고 그 산길 굽이 돌아
서울로 가는 길, 이 노래만 불렀지
서울을 등지고 남쪽 내려왔더니 강은 무심히 북으로 흐르더라
배는 물 가에 묶여 있고 그 곁으로 물고기들 더 멀리 거슬러 내려가고
솜털 꽃씨 한 웅큼 움켜쥐고 길고 가녀린 꽃대로 종일 흔들리는
이제 그만 놓아라 놓아주어라, 마당 가의 가을 민들레
남한강 대교 한적하고 그 산길 굽이 돌아
부론 가는 길, 그 강변의 한 시절
밭둑 웅뎅이 키 큰 뽕나무 검정 비닐 한 폭 높은 가지에 매달고
저녁 내내 눈보라 속 깃발처럼 흔들고 있었지
별은 가까이 내 머리 위에 빛나고 여기 또한 그 별들 중의 하나임을
알지 못했네 알지 못했네, 겨울 고라니들이 산에서 내려왔네
남한강 대교 한적하고 그 산길 굽이 돌아
솔미 가는 길, 그 강변의 한 시절
2022. 10
_엘도라도는 어디
저녁 햇살 따사로운 고속도로 붐비는 휴게소
거기 가득 울려퍼지던 피리 소리는 어디
화려한 깃털 의상과 애잔한 음악 소리
구슬픈 그 멜로디들은 어디
자동차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나가고
누가 잃어버린 낙원의 신화를 얘기할까
안데스의 바람에 휘감기던 저녁 휴게소
오, 엘도라도로 가는 길
오, 잉카의 노래들은 어디
오, 그 때 그 사람들은 어디
모두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차에서들 내려
음, 식당으로, 편의점으로
그들이 노래하던 자리에선 누군가 색소폰을 불고
모두 바쁘게 그 앞을 지나가고
머리 길게 땋아 내린 샛파란 하늘의 사내들
하얀 산맥 아래의 말 수 적은 사람들
스피커에서 가늘게 떨리던 엘콘도르 파사
오, 협곡의 콘도르들을 부르던
오, 잉카의 노래들은 어디
오, 그 때 그 사람들은 어디
오늘은 노을도 번지지 않는구나
그들의 노래도 들리지 않는구나
멀고 먼 산 구름 걷힌 마추픽추
오, 그 산정의 피리 소리
이제는 트로트 흐르는 휴게소
오, 그 때 그 사람들은 어디
모든 길 위에 하나 둘 별이 뜨면
오, 그 엘도라도는 어디
2022. 4
__집중호우 사이
올 여름엔 파란 수국 꽃을 기다리지 않겠다
아직 내 젖은 발목만큼도 올라오지 못한 어린 잎새들
전쟁 같은 폭우 장마에 강물 흐르는 주택가
멀리 포성과 섬광이 멎고 문득 지리멸렬해지면
그 갯벌 키 작은 갈대 밭 붉은 다리의 어린 농게들이
질퍽한 각자의 참호에서 간지러운 햇살 기다리리라
오, 서기 이천 이십 이년
유월 말일, 오후 세 시
누가 참혹한 장마 전선에서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느냐
강북 강변 낮은 도로변엔 능소화 모두 널부러졌다
골목길 투명 비닐 봉지, 갈증의 물병들이 떠내려가고
요란한 응급차들이 장대비 양화로 커브길을 질주한다
서해 바다 해안길 마다 휴전의 펜션 무너진 담장들
거기
하얗고 또는, 새파란 수국 꽃들이 흐드러지리라
오, 서기 이천 이십 이년
유월 말일, 오후 세 시 삼십 분
뚝 부러진 가로수 가지 아래 통신선들이 흐느적거리고
남서풍에 구름이 몰려오고 태풍 경보 다시 발령되는 사이
낡은 연립들 여전히 씩씩하게 유리 빌딩들 곁에 서 있고
화단의 바람 잠든 사이 수국 잎새 하나 더 틔우리라
그 갯벌 키 작은 갈대 밭 붉은 다리의 어린 농게들이
질퍽한 각자의 참호에서 일제히 기어나오리라
오, 서기 이천 이십 이년
유월 말일, 오후 세 시 오십 구 분
2022. 7
__폭설, 동백의 노래
겨울 강 어디쯤에서 하얀 눈발 날리고 있더냐
누구의 그리움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더냐
세상에 눈물이 넘쳐 깊은 강으로 흐르다
아니다, 아니다,
바람을 타고정태춘 박은옥 12집 앨범 <집중호우 사이> / 메타 데이터
돌아오고 있더냐
붉은 동백은 고요 속으로 뚝 뚝 떨어지고
그리워, 그리워요
소리도 없이 날리고 있더냐
세상에 눈물이 넘쳐 깊은 강으로 흐르다
아니다, 아니다,
저녁 숲으로
돌아오고 있더냐
붉은 동백은 적막 속으로 뚝 뚝 떨어지고
그리워, 그리워요,
소리도 없이 쏟아지고 있더냐
그리워, 그리워요,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더냐
2022. 7
__정산리 연가
“나라구 왜 한 때 좋은 날들이야 없었을라구”
대절 버스 도시 아줌마덜 채소밭에 모종 내구
강물 반짝이며 봄날은 간다
아침 강 안개 낯선 손님들 기척에 물러가고
그 손님들 낮은 장화 풀 이슬에 다 젖는데
강물 반짝이며 봄날은 간다
언제적 청춘이냐, 언제적 사랑이냐
강물 소리없이 봄날은 간다
“나라구 왜 한 때 좋은 날들이야 없었을라구”
앞 산 진달래에 뒷산 뻐꾸기 애절한데
강물 반짝이며 봄날은 간다
언제적 청춘이냐, 언제적 사랑이냐
강물 소리 없이 봄날은 간다
2022. 4
__하동 언덕 매화 놀이
“가는 비에 매화 향내 흩어지고
멀리서 온 손님네들 길 떠난다고 바쁘시고”
봄날은 오래 머물지 않고
주인은 꽃 젖어 근심이라
내가 여기 언제 왔던가
겨우 어제 하룻밤만 같은데
꽃 좋고 고요한 곳 없더라, 쌍계사 스님들이 돌아앉아도
하동 언덕에 봄 매화가 지천이요, 화개천에 그 꽃 물이 흐르는데
오, 봄이로구나
오, 잘 있거라
“천왕봉 안개 걷히지 않고
불일 폭포 찬 물 그저 쏟아지고”
봄날은 오래 머물지 않고
마당의 바람 햇살을 휘감는데
내가 여기 언제 왔던가
한 오백년 머문 것만 같은데
꽃 좋고 고요한 곳 없더라, 녹찻물 끓이는 소리도 버글버글
섬진강 은어떼 보이지 않고 산수유 앞다퉈 움트는데
꽃 좋고 고요한 곳 없더라 누가 떠나도 누가 온다, 그 산 아래
산사의 목탁 소리 굼뜨지도 서두르지도 않는데
오, 봄이로구나
오, 나는 간다
오, 봄이로구나
잘 있거라, 나는 간다
2022. 4
앨범 리뷰
태초에 노래가 있었다. 저 아득하게 먼 옛날, 무언가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토해내던 어떤 흥얼거림, 몸짓과 소리의 덩어리, 그것을 노래라 부를 수 있다면, 거기에서 말이 시작되고 시가 나왔다. 포크(Folk)는 바로 그런 노래의 원초적인 형식에 가장 가까운 장르다. 포크에서 중요한 것은 악기와 사운드, 음악적 스타일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 담긴 언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사람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을 구성하며 자신을 표현하고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 삶은 이야기의 연쇄이고 노래는 그 이야기를 담는 가장 중요한 그릇 가운데 하나다. 정태춘의 노래는 바로 그런 노래의 원형적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포크다운 음악이다. 그가 오랫동안 음유시인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2012) 이후 무려 13년이 훌쩍 지나 새롭게 내놓는 정태춘-박은옥의 새 앨범 <집중호우 사이>는 세상을 응시하며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시적 울림으로 그려내는 정태춘 음악의 특질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마치 카메라
같은 시선으로 그가 목격한 세상의 다양한 풍경들을 읽어낸다. 세상을 대하는 그 카메라는 한층 깊어지고 더욱 농밀해졌다. 언뜻 하찮아 보이는 눈앞의 풍경은 그의 조용한 읊조림 속에서 음악적 상상력과 결합하며, 여러 시간과 공간의 층위로 확장된다. 해 질 녘 들판을 날
아가는 기러기(<기러기>)는 무슨 이유에선지 아직 돌아오지 않는 소년의 이야기로 연결되고, 산길 끝에 서 있는 ‘길이 없습니다’라 쓰인 작은 간판(<도리 강변에서>)은, 모두 떠나고 남은 이 없는 어느 강변의 어둠으로 확장된다. 생선구이 집 쪽창에 붙박인 작은 범선의 그림(<나의 범선들은 도시를 떠났다>)은 불모의 시멘트와 아스팔트, 도시의 메마른 숲으로 이어진다.
그 노래들이 그려내는 풍경은 대체로 어딘가 황량하고 쓸쓸하다. 거기에는 늘 잃어버린, 혹은 사라진, 그래서 문득 아쉽고 허전한 유토피아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40여 년 전 처음 음악의 길을 들어섰을 때부터 그는 언제나 잃어버린 고향,
누군가에게 빼앗긴 유토피아를 이야기해 왔고, 이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주저 없이 뛰어들어 거리를 누비는 투사의 이미지를 얻기도 했다. 칠순을 넘긴 시점에도 세상을 응시하는 정태춘의 시선은 여전히 낮고 여린 곳, 무너지고 밟히고 사라진 곳을 향해 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단지 현실의 황량함에 머물지 않는다. 그 속에는, 전쟁 같은 장마의 포성이 사라지고 나면 간지러운 햇살을 맞을 준비를 하는 어린 농게들(<집중호우 사이>)이 있고, 봄날은 오래 머물지 않고 누군가 떠나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다시 오며(<하동 언덕 매화 놀이>), 세상에 눈물이 넘쳐도 저녁 숲으로 돌아오는 붉은 동백(<폭설, 동백의 노래>)이 있고, 노랗게 피었다 꿈같은 씨앗 되어 세상으로 흩어지는 민들레(<민들레 시집>)의 희망이 있다.
노래는 본디 시와 음악의 결합이지만 대체로 대중음악의 역사는 노래의 시적 차원이 점차 약화되고 감각적인 사운드와 리듬의 육체성이 더욱 강화되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시적 정취를 강하게 띄고 있던 정태춘의 노래는 그 문학적 지향이 강력한 음악적 질감을 만들어낸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그의 창작은 늘 음악적 욕망보다 언어 혹은 문학적 표현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어왔다.
이번 새 앨범은 이른바 상업적 대중음악을 둘러싼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그의 문학적 욕망이 가장 자유롭게, 집중적으로 발현된 작업의 결과물이다. 음악과 사운드는 가수의 목소리를 가리지 않도록 최대한 절제되며 노랫말의 문학적 질감을 도드라지게 하는 딱 그 지점
까지 작동한다. 그렇다고 음악적으로 단순하다는 뜻은 아니다. 포크의 기반 위에서 록과 팝, 트로트의 요소까지 다양하게 동원된 음악적 자원들은 그의 노래가 늘 그렇듯 노랫말에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아름답게 공명한다.
그렇기에 이 노래들은 그저 흘러가는 소리에 감각적으로 몸을 맡기는 방식이 아니라 노래와 함께 가사를 음미하며 그가 그려내는 풍경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되풀이 생각해야만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사운드와 리듬에 육체적으로 반응하며 감각적 즐거움을 찾는 요즘 대
중음악의 일반적인 청취 방식으로 그의 노래가 가진 그 깊이와 질감을 제대로 느끼기는 어렵다. 그러고 보면 정태춘은 이번 앨범을 통해또 하나 묵직한 사회적 발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물질적 감각과 자극, 직설적이고 즉각적인 욕망의 추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세상에서, 시적 성찰과 사유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노래가 가진 가장 원초적인 의미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__김창남 (성공회대 명예교수)
한국 대중가요가 이룩한 최고의 문학적 성취.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 노래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했다면, 정태춘은 한국적 포크 음악의 영역에서 누구도 도달하지 못할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왔다. 그중에서도 이번 12집 음반 <<집중호우 사이>>는 지금까지 한국 대중가요가 이룩한 최고의 문학적 성취이다. 이 음반을 준비하기 전에 정태춘은 사석에서 “그간 한국 문학에 진 빚을 갚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음반은 한국 문학에 진 빚을 갚는 수준을 넘어서서 한국 문학에 더해진 또 하나의 탁월한 문학적 성과이다.
대중문화의 힘은 그것이 현실과 맺는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 결핍의 현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대중-주체들의 정서를 꾸밈없이 자극하고 대변하는 것이야말로 대중문화가 갖고 있는 매혹의 힘이다. 대중문화는 때로 지배 이데올로기 재생산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자본의 환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유토피아 욕망의 무의식적 표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은 불덩이처럼 뜨겁고 아프고 허황되며 진실하다.” 정태춘의 음악은 이 “뜨겁고 아프고 허황되며 진실한” 매체가 (시스템에 저항하는) ‘자율적’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다.
정태춘의 노래에는 (루카치 G. Lukács 식으로 말하면) ‘사라진 총체성’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존재한다. 루카치가 말했던 대로 ‘우리의 모든 갈 길을 비추어주던 하늘의 별빛’은 사라진 지 오래다. 정태춘에게 있어서 상징적 ‘고향’은 가난하지만 공동체가 살아 있는 유토피아이고, 그것을 상실한 현재의 공간은 일종의 디스토피아이다. 말하자면, 그는 디스토피아에 버려진 유토피아니스트이다. 이번 음반에서도 소멸되어 가는 것, 사라진 공동체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 흥건하다. 고향의 서사에서 사라진 “소년”(<기러기>) 아득히 멀어지는, 고뇌가 어려있던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도리 강변에서>), 도시를 떠나 “유년의 바다”로 간 사람(<나의 범선들은 도시를 떠났다>), 안데스에서 쫒겨나 낯선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잃어버린 낙원의 신화”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엘도라도는 어디>)은 모두 사라진 ‘근원’에 대한 뼈아픈 그리움의 상징들이다. 이렇게 보면 정태춘의 세계는 자본 지배의 세상에서 이제는 사라져 어디에도 없는 상상의 공동체를 찾아가는, 뿌리 뽑힌 자의 ‘오디세이아’이다.
__ 오민석 (단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