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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 오피니언 지면 연재

​"정태춘의 붓으로 쓰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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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无言勿執筆 若有言必彫琢 

“할 말 없으면 붓을 잡지 말고,할 말 있으면 필히 다듬어라” 

 

 

나의 ‘붓글’ 쓰기 ​

 

한 10 여 년 전. 그때, 나는 참 한가했다.
노래 만들기도 이미 접었고 세상과의 소통이나 교류도 접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6년 경의 대추리 투쟁도 다만, 내 고향에의 헌신이요 고향 사람들과의 연대 정도로 생각하며 함께 싸우고 아프게 마무리 된 이후였다. 노래 활동도 대개 행사 초청 공연들에 간간이 참가하고 있었고.. 참 시간이 많았다. 

아내인 박은옥씨가 어느날 한문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중고교 때 한문을 전혀 안 배운 세대라고 재미삼아 천자문이라도 시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 방에서 찾아보니 마침 지인인 한학자 추만호 씨가 준 그의 저서 <천자문 강의>가 있었다. 그걸 내놓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내는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 

“에라, 내가 해 볼까.”
아내하고 난 3 살의 차이 밖에 나지 않지만, 난 중고교 때 한문을 배웠고 한자가 들어간 신문도 봤던 세대라 시작도 그만큼 쉬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깊은 생각없이 아니, ‘어디 한 번 천자문을 다 외워 볼까, 나 같은 건망증 심한 사람이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정도의 마음으로 그걸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왕이면 고등학생 기분이라도 나게 ‘펜으로 쓰면 어떨까’, 하는데 펜촉이 없었다. 서울의 가까운 동네에선 그걸 구할 수가 없었고 강화도 어느 절에 공연을 가면서 읍내 외진 마을의 문방구에 찾아가니 거기 그게 있었다.

난 정말 시간이 많았다. 하루에 세시간, 네시간 천자문을 펜으로 썼다. 그렇게 천자문의 반쯤을 써나가는데 어라, 내 안에서 한시가 나오는 게 아닌가. 

 

我曰, 半讀千字 半開心門 

妻曰, 讀五百字 風增二倍 

아왈, 반독천자 반개심문 / 처왈, 독오백자 풍증이배


내가 말하기를, 천자문 반을 읽으니 마음의 문이 반이 열리네 

아내가 말하기를, 오백자 겨우 읽더니 뻥이 두 배로 늘었네 

2011. 10

 

이런 걸 한시라고 말할 수야 없지만 한시 쓰기로 들어갈 만한 길이 열리고 있는 셈이었다. 

‘뻥이란 말을 뭐라고 표현 하지?’ 하며 그 추 선생께 물었다. 그랬더니, “풍이지요 뭐, 바람 풍..” 

펜글씨를 너무 많이 썼나? 오른쪽 엄지 손가락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단련이 되면 괜찮겠거니 생각하며 계속 집중을 하는데 더 이상 글씨를 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글씨 쓰기를 멈추고 정형외과엘 가고, 물리치료에 약을 먹어도 쉬이 회복되지 않고 볼펜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 붓은 어떨까..’ 하며 책상 머리 오래된 필통에 꽂혀있던 작은 붓을 잡아보니 그건 그런대로 쓸 수 있었다. 잉크를 찍은 붓으로 또 천자문 쓰기가 시작되었고 진도가 천자 가까이 나가니 오백 자까지는 안보고도 쓸 수 있게 되었다. ‘허어.. 나도 영 기억력 없는 사람은 아니네..’ 하며. (그러나, 그건 잠시의 착각..)

한시도 나오기 시작했다. 

 

卓上紙筆墨 心滿愁想念 窓下迎秋陽 暫伏欲長眠 

탁상지필묵 / 심만수상념 / 창하영추양 / 잠복욕장면
2011. 10 

 

책상 위에 지필묵이요 / 마음 가득 쓸쓸한 상념이라 / 

창 아래 갈 햇볕 모시고 / 잠시 엎드려 긴 잠 자고 싶구나 

 

천자문을 끝내고, 옛 학동들이 공부하던 한문 교재들을 두루 훓고 사서삼경에 들어갔다. 마음이야 얼른 한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한문 문법을 제대로 알아야 하겠기에 산문부터 쓰기 시작했다. 다행히 좋은 교재들을 구할 수 있어 사서의 <논어>, <맹자 >, <중용>, <대학>을 해제들을 통해 공부하면서 되풀이해서 쓰고, 그 다음에 <역경>은 너무 어렵고 관념적이라 건너 뛰고 <서경>은 역사서에다가 다시 지루한 산문이라 급한 마음에 또 건너뛰고 <시경>에 집중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다른 한학자 지인의 추천을 받아 <고문진보>를 <시경>만큼 붙잡고 공부했다. 그리고는 조선조 한시들을 주욱 들여다보게 되었다. 

곁으로, 한문 문법과 한시 작법들을 공부하면서 내 안에서 한시들이 더 쏟아져 나오고, ‘아, 이게 바로 시마(詩魔)에 붙들렸다는 거구나’ 했다.
그러나, 쓰다보니 이걸 나눌 사람이 필요한데 즉,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함께 즐길 사람이 필요한데 주위의 누구 하나도 한시에 관심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우리말 시나 제대로 하지 뭘..” 핀잔을 주거나 아예 무관심 그 자체였다. 인터넷의 한시 동호회들에도 찾아들어가 보았지만 거긴 내용보다도 문법 또는 전통적인 한시 작법을 철저히 우선시하는 엄격한 분위기였다. 난, 그때 영어 알파벳도 들어가는 한시를 생각하고 있었다. 

 

都邑0下10餘度 

西北寒波舞劍風 

APT數千世代 

家家戶戶湯水浴 

漕內誰問此義乎 

壁下幼猫過哭聲 

도읍영하십여도 / 서북한파무검풍 / 아파트수천세대 / 

가가호호탕수욕 / 조내수문차의호 / 벽하유묘과곡성 

2012. 2 

 

도읍 영하 10여 도요 / 서북 한파가 칼바람으로 춤추는데 /
아파트 수 천 세대 / 가가호호 끓는 물 목욕을 하고/
욕조 안에서 누가 묻네, 이게 옳은가? / 담벼락 아래로 어린 고양이 울며 지나가고... 

 

붓은 좀 더 큰 것으로 옮겨잡게 되고, 화선지에 먹과 벼루도 방에 들여놓게 되고 낙관도 스스로 파게 되었다. 필법이라면 다만 “정봉(붓을 수직으로 잡기)”이란 얘기만 인터넷에서 보고 더 배운 바도 없으나 이제 소일거리 수준을 넘어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글씨가 그렇게 함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거기에다 한시도 시들해 지고.. 

그러다가, 한글을 쓰게 되었다. 

내 안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이야기들, 어구들을 그냥 한글로 써내는 일이었다. 

그럼 이렇게 붓으로 글씨를 쓰는데 이게 서예? 캘리그래피?

전에 나도 얼마간 관심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내 글씨를 캘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예쁘거나 튼튼한 조형감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하물며 붓글씨나 서예는 내게 너무나 멀고 이제 공부를 시작하기엔 너무나 늦었고.. 하지만 난 내 이야기를 붓으로 계속 쓰고 싶었고 내 안의 이야기들을 짧은 어절이나 문장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비로소, ‘난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구나, 수다쟁이로구나. 그래서 노래도 했고..’ 노래가 내 말의 그릇이거나 말을 풀어내는 도구였듯이 이제 붓도 그렇게 되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종이도 화선지가 아니라, 도배 장판 가게에 가서 초배지를 잔뜩 사왔다. 가격도 가격이려니와 그 흰색의 엄격함, 통제가 쉽지 않은 먹물 번짐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또, 생각과 말은 마르지 않아 쓰고 또 쓰게 되었다. 또, 버리고, 버리고.. 일부는 비실명으로 운영하는 내 블로그에 올리고.. 

붓을 잡기 전, 몇 년간 사진을 찍으면서(어줍잖은 개인전도 했었다) ‘버리는 일이 곧 안목을 키우는 일’이란 걸 알았듯이 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는, 나의 글씨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못난 글씨, 막글.. 그러나, 그게 또 나의 글씨라고. 그러자, 글 쓰기가 조금 편해졌고 한시의 규격에서 벗어나는 일의 즐거움이 더해졌다. 

 

 

 

"노래, 마음이 부르지 목이 부르나"

 

이런 것도 재미있어 보였다.

2018년의 이사로 작업 환경도 좋아졌고 여전히 시간도 많았고, 저 글을 쓰고 나서 비로소 “작업”으로서의 가능성을 믿게 되었다. 비록 막글일지라도 나만의 글씨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하면서 내 작업을 <붓글>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서예도 캘리그래피도 아니다, 라고 슬쩍 뒤로 물러서면서.

와중에 그간의 내용을 좀 아는 미술 쪽 후배 김준기 씨(미술평론가, 하물며 박사!)가 곁에서 격려해 주었다. 이건 새로운 창작 장르라고, 거기 글씨에 그림을 좀 얹으면 그게 바로 현대 문인화가 되는 거라고 추켜세웠다. (그는 자칭 정태춘의 시각예술 매니져이니까). 그 꾀임에 글씨에 더러 그림도 그려넣게 되었지만 없는 재주는 최대한 자제할 밖에..

문제는 글의 내용인데, 내가 내 안에서 나름 엄격하게 골라내기만 한다면 제법 재미있는 작업이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若无言勿執筆 

若有言必彫琢 

약무언물집필 약유언필조탁 

 

할 말 없으면 붓을 잡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필히 가다듬어라 

 

이건, 아직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내게 해 주는 말이다. 

 

우리 부부의 노래 활동 40주년을 기념하는 일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 

전국을 순회하는 콘서트, 기념 앨범, 시집과 노래 에세이 출판에 미술인들의 축하 전시가 기획되었다. 김준기 씨가 거기 전시회에 내 작품들도 함께 걸자는 것이었다. 

작품으로서의 수준이나 질이 문제지 지난 여름 가을에 써놓은 글들이 양으로는 충분했다. 감수를 위해 평소 선배님으로 알고 지내던 미술 평론가와 갤러리 하시는 지인분들이 내 작업실에 와서 보시고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으로 격려를 해 주시고, 그게 또 소문이 나서(소문을 내서) 한 일간지 편집부에서 또 다녀 가시고.. 거기 연재를 하게 되고..
 

일이 이렇게 커져버렸다. 

게다가, 프로젝트 홍보를 위해 공영방송 티비의 두 개 프로그램에 특집으로 출연하면서 이 붓글들이 거기 티비 화면에도 떠억하니 비춰지게도 되었다. 

 

뭐, 부끄러울 것은 없다. 붓글들. 그 안의 내 사유나 언술들이 과연 나잇값을 하고 있는가가 문제일 뿐.

내 이야기를 벽에 건다. 

그저 함께 찬찬히 들여다 볼 거리가 되길 바라면서.. 

 

 

<4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술전이 열리게 되었다. 어느 가수 부부의 몇 몇 주년 기념 사업 같은 것에 미술인들이 축하 전시를 열어 주다니.. 그것도 두 번 씩이나..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 10 년 전에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고 이런 일이, 부족한 내게 과분하고 쑥스러운 일인가 아닌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시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실, 음악인 정태춘은 음악 쪽에 보다 미술이나 다른 장르의 예술인들과 넓은 교분을 가져왔다. 참여하고 실천하는 예술을 통해서였다. 이런 교분은  동지적 연대감으로 이어져 왔고 또, 참여 작가들이 대개 그렇게 아는 분들이라 함께 즐기자는 마음으로 준비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전시장 한 켠에 외람되이 내 ‘붓글’ 작업을 덤으로 전시하게 되었다. 

“선배님들, 후배님들, 나두 좀 끼워주세요오.. 걍, 붓으로 쓴 노래예요오” 

 

참여 작가 여러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2019. 4.

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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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전 / 도록 인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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